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왕의 난 (문단 편집) === 재물과 권력의 남용 === >지금 토지는 넓고 사람은 드문데도 부족한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사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질검을 숭상하게 하고 싶다면 마땅히 그 사치한 사람을 힐책하여야 하는데, 사치해도 힐책을 받지 아니하니 돌고 돌아서 도리어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서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 >《자치통감》 태강 3년(282), 거기사마 [[부함]]의 상소 애당초 법가적 정책을 지양하면서 귀족적 풍조를 잡겠다는 방향 설정 자체도 문제였다. 이는 곧 '''사치를 금지하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법가사상 대신 내세워진 유교적 검약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모르겠지만, 기존의 유교사상은 이미 형식만 남아 문벌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온정주의로 왜곡한 지 오래였다. 예컨대 선비의 윤리의식을 가늠하는 기준의 하나였던 3년상 관습이 후한시대에는 명성과 관직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 있었다.[* 원래 3년상은 이런 의도가 아니었다. 공자가 3년상에 대해 비판한 재야에게 "자식은 태어나 3년은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무릇 부모를 위해 3년상을 치르는 것이 천하에 통하는 상례인 것이다."라고 했듯이 원래의 목적은 달랐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원소(삼국지)|원소]]가 있다.[* 원소는 자기 생모가 아닌 원가의 정실부인의 3년상을 치르고, 곧 이어 자기가 태어났을 때 이미 고인이었던 호적상의 아버지 원성의 3년상을 이어서 치르면서 6년상이라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행했고, 이를 통해 얼자라는 태생적 약점을 씻어내고 당대 청류파 명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구품관인법]]이 더해진다. 구품관인법의 당초 목적은 여론조사를 통해 '''이름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었지만, 평가 기준이 객관적이지 못하다 보니 여론조사관인 중정(中正)이 뇌물을 받거나 거대 문벌들의 눈치를 보고 여론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부터 등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망했어요-- 중정의 자격과 활동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면 그나마 문제가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사마염은 중정들에게 사실상의 면책특권을 줘버리고 말았다. 이런 구조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274년부터 283년까지 선조랑(選曹郞)[* 관리 선발 담당이다.]을 지낸 [[산도(서진)|산도]](山濤)는 정작 인재를 배치할 때에는 언제나 사마염의 눈치부터 봤다. 즉 공석이 생기면 그 자리에 배치할 후보자 명단을 만들어 비공식적으로 사마염에게 제출하고, 사마염이 그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해야 그 사람을 공식적으로 인사에 배치했다. 즉 아무리 재주있고 평판이 있어도 사마염의 눈 밖에 있으면 장외탈락이었다. 때문에 산도는 인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는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사마염은 당연히(?) 언제나 산도를 감싸주었다. 사서에서는 이게 무슨 군신 간의 의리를 보여주는 미담처럼 포장되었지만 국가 건전성 측면에서는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일찍이 [[호위(서진)|호위]]가 상서가 되었을 때 당시의 정치가 관대한 것을 간언하니, 황제는 "상서랑 이하에게는 내가 가차없이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호위는 "신이 말씀드리는 것이 승·랑·영·사와 같은 하급 관원들이겠습니까? 바로 소신과 같은 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분위기가 엄숙해지고 법령이 분명해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 >《자치통감》 태강 원년(280) 게다가 사마염의 관대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서, 문벌들의 각종 범법행위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그나마 관대함이 일관성이나 있다면 몰라도 또 그게 그렇지도 못했다. 결국 밑에 힘없는 누군가가 책임지고 독박을 썼으니… 일테면 이미 사마염의 재위 초기인 267년 1월부터 관전을 점탈했다는 죄목으로 [[산도(서진)|산도]], [[사마목]], [[무해]], [[유우(서진)|유우]]가 함께 고발되었는데 산도, 사마목, 무해는 그냥 방면되고 일개 현령인 유우만 목이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 뒤에도 사마사의 인척이자 사마염의 최측근인 양수는 아무리 탈법적으로 재산을 모아도 사마염이 보호해준 덕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빽이 없는 게 죄인 시대. 그리고 또 하나 말하자면 온갖 사고치고 비리 저지르고 하면서 그 열매는 빽있고 지위있는 사람이 먹지만, 일이 잘못되면 독박쓰고 책임지는 건 빽도 지위도 없는 아랫사람들이었다는 것. 다른 예 하나를 들어보자. 서쪽에서 저족과 강족이 날뛰게 되는데, 당시 정서대장군이던 조왕 [[사마륜]]의 일처리는 영 개판이었다. 형인 학산의 죽음으로 벼르고 있던 학도원부터 저족들을 모아서 한바탕 벌이려는 제만년까지 아주 끝간데 없이 날뛰는 마당에 별 대책도 없었다. 그러다 혜계와 손수가 작전 문제 등으로 서로 표문을 올려 디스를 하는 등 일이 좀 커졌고, 구양건까지 나서서 사마륜의 죄상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도 책임을 물어 사마륜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사마융을 도독옹양이주제군사로 삼아 변방을 맡게 하는데, 이 문제의 책임자 사마륜은 불러들여서 거기장군(…)이 되고, 정작 책임을 지는 방법이랍시고 내놓은 이야기가 사마륜의 측근 손수의 목을 베어 저족과 강족에게 사과하고 문제를 해결하자는 소리였다. 팔왕의 난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기회에 훗날 큰 후환이 되는 손수를 죽이지 못한 것이 커다란 실책이었을지는 몰라도 여기서 손수의 죄는 그저 해계와 군사적 문제로 다툰 것과 사마륜의 측근으로 사마륜 대신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한다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손수는 그나마 신염이 변호를 해 주어 살았지만 그 뒤에 진짜로 희생자가 된 건 오나라의 항장으로 아무런 빽도 기반도 없는 주처였다. 그리고 주처가 그 쪽으로 가게 된 건 저 잘난 해계가 학도원과 싸워서 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세가 오른 반란군들은 제만년을 앞세워 칭제까지 해버린다.] 결국 주처는 사마융의 뒤끝 때문에 지원도 보급도 제대로 못 받고 싸우다 결국 죽게 되는데, 주처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는 걸 알자 도시락 싸들고 가서 노모를 핑계로 나가지 말라고 말린 게 바로 저 위에서 '''책임을 독박 쓰고 죽을 뻔한 그 손수'''였다.[* 손수는 젊은시절 하급 관리로 근무할 때 태수도 아니고 태수 아들인 반악에게 싸커킥까지 맞는 대 굴욕을 겪는 등 당시 위진사회의 갑질에 엄청나게 학을 떼고 있었을 사람이었다. 그가 훗날 흑화하게 된 게 저런 사회의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처에게 저 임무를 맡기기 전부터 사마융 성격에 주처가 잘못될 걸 알았던 사람들도 많았고, 주처 사후에도 그의 죽음과 패전은 사마융의 탓임을 천하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이 시대에는 아주 당연하게도, 사마융에게는 '''어떤 죄도 묻지 않았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던지 주처가 이 임무를 맡게 되었을 때, 중서령 진준은 이런 말로 간하였다. >하후준과 양왕은 모두 귀한 친척으로 장수의 재목이 아니니, 그들은 진전하여도 더 이상 얻을 명성이 없고, '''물러난다고 하여도 죄를 받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처는 오 지역 사람이어서 충성스럽고 곧으며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는데 원수는 있으나 그를 원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 >《자치통감》 원강 6년(296) [[제국(아카메가 벤다!)|잘못해도 높으신 분들은 죄를 주지 않으니]] 책임질 일도 없는지라 열심히 하지도 않을 거고, 아무런 빽도 없는데다 사마융에게 원한까지 샀던 주처 정도는 그냥 패전의 희생양으로 삼거나 아님 다른 해코지를 해버리면 그만일 테니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일은 실제로 딱 그렇게 되었고, 정작 주처가 싸우다 물러나 살아돌아왔다더라도 사마융의 등쌀에 딱 손수 꼴이 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래저래 결과적으로 일을 엉망으로 처리한건 윗분들이시고 희생은 아래서 다 떠맡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더 끌다가 맹관이 제만년을 진압한 후, 사마융은 그 공으로 대장군, 녹상서사로 영전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결국 사마염의 집권 명분과 이념이 취약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권의 존립 근거가 문벌귀족의 지지에 의존하다 보니, 황제가 자신의 지지 기반인 귀족에게 감히 손찌검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의 귀족은 아래 서술되는 청담사상의 영향과 맞물려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대표적 사례로 황제가 왕개에게 내린 산호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 부순 석숭이나, 황제의 원림에 쳐들어가 오얏나무 열매는 열매대로 다 따먹고 나무는 나무대로 베어버린 왕제가 있다. 또한 왕제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 고기'를 대접하자 사마염은 몹시 불쾌해했지만 내색도 못 하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염이 기껏 권위를 세운다고 선택한 방법이란 '''돈지랄하는 귀족보다 더 돈지랄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중근세 유럽이라면 딱히 나쁜 전략은 아니다. 이 시대의 유럽에서는 사교활동이 중요했는데 여기서 얼마나 돈지랄하느냐는 그 사람의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을 상징하기 때문, [[부르봉 왕정복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주인공인 에드몽 당테스가 돈을 물쓰듯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중국은 그런 거 없고 [[인맥]]이 더 중요했다. 혈연은 당연하고 한나라 시절에는 추천을 통한 인맥이 출세에 크게 작용했다. 물론 추천이라는 한계상 문제가 없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돈지랄 싸움이나 벌이는 서진보다는 나았다.] 정작 석숭의 사례를 보듯 이마저도 패배(?)했다. 이러한 막장을 자정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두예#s-1|두예]]나 [[유의#s-2|유의]] 등 일부 문관들이 구품관인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고 당대 사회의 풍조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으나 사마염은 말로만 옳다꾸나 했지 실제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황제부터가 사치에 호의적이고 황권이 약하니 씨알도 안 먹히는건 당연한 일이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